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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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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39년(1544) - 선조 25년(1592)

김포군 서감정리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이곳에서 보냄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하여 보은 차령과 청주성에서 왜적을 무찔렀으며, 금산전투에서 칠백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함.

과거시험 병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차, 정자를 거쳐 전라도사, 공주목교슈등을 지냈으며, 저서로는 동환봉사가 있음

 

조헌은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 6월 28일에 경기도 김포군 서감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지린의 17대 손으로, 아버지 조응지와 어머니 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네 아이들의 놀림을 받을 정도로 유난히 귀가 컸으며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열심히 하여 '귀보'와 '책벌레'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다.
선조 7년 조헌이 서른 한 살 때 질정관의 벼슬을 받아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명나라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 하례식에 참석한 그는 공자님과 공자님의 제자들을 모시는 성묘에 참배하여 일부 성현들을 모시는 차례가 잘못된 것을 지적해 주었다. 이것을 본 명나라 성묘 책임자들은 아무도 지적한 바가 없는 것을 밝힌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여 칭찬하였다. 명나라에 다녀온 조헌은 그 이듬해에 벼슬에 올라, 호조좌랑(재무를 맡은 차관보), 예조좌랑(지금의 교육부와 외무부의 차관보), 사헌부(감찰재판소의 벼슬아치)등을 거쳐 그해 12월에 통진 현감에 임명되었다.

 

선조25년(1592) 임진년 4월 13일, 일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조헌은 옥천에서 김절, 김약, 박충검 등과 의논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그들을 훈련시켜 왜군이 진격해 오는 선봉을 꺾기 위해 보은에 있었던 차량산채에 배치하였다. 철썩같이 믿었던 신립 장군은 방어하기 좋은 새재를 적에게 내주고 혼전만 거듭하다가 충주 달래강에서 전사하고 말았으며, 이일 장군과 군사들은 상주에서 활 한 번 제대로 쏘아 보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당시 왜군이 사용한 조총은 화승총으로 발사시간이 매우 느린 총이었다. 우리 관군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지레 겁을 집어 먹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조헌은 차령에서 일찍이 훈련시킨 활 잘 쏘는 의병들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그의 문인 이우, 이봉, 전승업 등과 의논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고,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이 청주에서 왜적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청주성으로 달려가 승병과 합세하여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
조헌필적 청주성에서 대승을 거둔 조헌은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호남순찰사 권율 장군에게 부탁하여 함께 협공하자고 하는 서신을 보낸 후 칠백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승장 영규대사의 삼백여명의 승병과 함께 금산으로 향했다. 권율장군은 공격일자를 연기하자는 글을 조헌에게 보냈으나 그 글이 도착하기도 전에 조헌의 의병들은 공격을 가하게 되었고 권율장군의 군대가 오지 않자 왜군에게 포위되어 활과 식량의 부족으로 그 장대한 기개를 다 펴지 못하고 장렬하게 목숨을 거두었다.
우리의 고장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배워서 옳다고 생각한 것이면 항상 그대로 실천했다. 천성이 강직하고 불의 앞에 굽힐 줄 몰라, 남에게 헐뜯기고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에 시달렸으나, 바람앞에 등잔불 같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옥같이 귀중한 몸을 기꺼이 바쳤다. 조헌이 이끈 칠백 의사들의 넋은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남아 천추 만대에 길이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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